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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제2강 지동설이 확립될 때까지
이번 시간에는 똑같이 태양중심설을 이야기한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를 중심으로 지동설이 확립될 때까지의 과정을 알아보자.
많은 사람들이 태양중심의 우주모형인 지동설이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매우 과학적인 논리로 기원전에 이미 태양중심설을 주장했던 학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us BC320-230))이다. 아리스타르코스 시대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뒤집고 태양중심설을 제시했다.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행성은 그 주위를 회전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지구는 1년에 1회 공전하고, 하루에 1회 자전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이런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만일 지구가 중심에 있고, 행성이 지구 주위를 주전을 따라 돌고 있다면, 지구와 행성사이의 거리가 거의 변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행성의 밝기는 거의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행성의 밝기는 변하기 때문에 지구가 중심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태양에 비해 극히 작은 지구가 태양을 회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연 어떤 근거로 태양이 지구보다 크다고 했을까?
먼저 아리스타르코스는 달의 크기를 측정을 했습니다. 개기월식이 일어날 때 지구의 그림자와 달의 크기를 비교하여 달은 지구 크기의 정도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그는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와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의 비를 계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달이 반달이 되었을 때이다. 달이 반달이 되면 태양-달-지구가 이루는 각이 직각이 되어 쉽게 삼각비를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지구-달이 이루는 각도를 약 87°로 추정했다. 그 값을 이용하면 태양-지구 사이의 거리()가 지구-달 사이의 거리()의 약 20배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태양-지구 사이의 거리는 지구-달 사이의 거리의 400배로 실제 값과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관측기술로는 400배에 해당하는 각도인 89.9°를 측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을 추정된다.
우리가 지구에서 태양과 달을 보면 크기가 거의 같게 보인다. 그 이유는 크기가 큰 태양이 달보다도 더 멀리 있기 때문이다. 달은 지구 크기의 이고, 태양-지구 사이의 거리가 태양-달 사이의 거리의 약 20배 정도라면 태양은 지구 크기의 5배가 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태양의 크기는 지구 크기의 약 109배 정도이다. 하지만 태양이 지구 크기의 5배 라고 해도 지구가 지구보다 큰 태양을 회전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은 그 당시 학자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배척된되는 그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시차의 문제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회전하고 있을 때, A지점에서 바라보는 오리온자리의 모습보다 B지점에서 바라본 오리온자리의 크기가 더 크게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관측을 해도 그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많은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별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면 눈으로 시차현상을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후에 망원경이 발명되고 나서야 아주 작은 시차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이 나올 당시의 상황을 봤을 때 당시의 관측결과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설명해도 충분할 정도로 지구중심설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시차현상과 같이 태양중심설로 설명하면 부족한 부분이 발생하기도 했다. 토마스 쿤은 그의 책 ‘과학형명의 구조’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패러다임의 위기를 맞아야 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위기를 극복했을 때 많은 과학자들이 신뢰를 보내 새로운 패러다임을 자리잡게 된다고 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태어나기 위한 지구중심설의 위기가 없었기 때문에 과학혁명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는 고대 이집트와는 달랐다. 많은 관측들에 의해 지구중심 천동설이 점점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지구중심설을 이용하여 대략적인 행성의 위치를 예측했지만 정밀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의 지구 자전축은 작은곰자리의 알파별인 북극성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기원전 15세기의 이집트 사람들이 관찰할 당시에는 용자리의 알파별이었다. 그리스의 히파르코스는 기원전 120년에 이전 천문학자들의 관측과 자신의 관측을 종합하여 회전축 이동현상인 세차운동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이 현상을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리한 지구중심설로는 관측값과 일치하는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당시 문화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고, 르네상스 시기의 신프라톤주의가 융성하면서 지구중심의 천동설이 위기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이 지구중심 천동설은 새로운 모순이 발생하면 이론의 일부를 수정하여 설명하고, 그렇게 수정하면 다른 쪽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었다. 세차운동은 달력을 제작하는 아주 중요하다. 당시에 달력 개혁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크게 작용하였고,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우주의 중심에 지구 대신 태양을 놓아 새로운 과학혁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지동설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태양을 중심에 놓으므로 인해 행성의 순행, 역행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다분히 전통적인 요소들이 다분히 들어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원운동을 고집했다. ‘신이 창조한 천체는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체의 운동은 완전한 도형인 원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실은 고대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지동설은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너무 급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학설을 발표를 미루다 자신의 친구인 오지안더 신부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출판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지안더 신부 자신도 그 내용이 너무 혁명적이었기 때문에 그 서문에서 ‘근본 원리는 단지 계산상의 편의에서 나온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가설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여 종교와 충돌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근대 사상가인 브루노는 이 서문을 읽고 오지안더 신부를 비난했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브루노는 종교재판을 받았고, 진실에 대한 그의 신념을 취소하거나 변경하라는 명을 거부하고 1600년에 화형을 당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하나의 이론을 창안한 것뿐만 아니라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다. 그의 시대 이전에는 지구가 모든 것이었으나, 이제 지구는 우주 속의 수많은 천체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참고문헌
-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도서출판 까치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 북스
- 이강환, 우주의 끝을 찾아서, 현암사
- 오진곤, 서양과학사, 전파과학사
- 위키백과, Aristarcus of Sa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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